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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리본 풀리고, 바래고, 끊어져도…고쳐매는 이들이 있다[세월호 10년, 함께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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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작성자 진주꽃 작성일날짜 24-04-13 18:05 조회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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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TV를 틀어 보여줬어요.(권민지씨)
전원 구조라 해서 안심했는데, 오후에 오보라는 소식을 접했어요.(남호원씨)
직장에서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김일수씨)
2014년 4월16일. 시민들은 전남 진도군 바다에서 거대한 여객선이 서서히 침몰하는 과정을 TV 화면으로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인스타 팔로워 일터와 학교, 집과 거리에서 지켜본 세월호는 10년이 지났지만 시민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10년 전 안산의 한 특성화고등학교 3학년이던 고은빈씨(28)는 단원고 애들 사고 났대라며 웅성거리던 목소리를 잊지 못했다. 울며 뛰쳐나가는 아이들을 선생님도 막지 않았다. 고씨는 안산 단원고등학교에 직접 아는 이는 없었지만 친구와 동생을 잃은 이들을 가까이서 봤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의 얼굴을 봤다. 시끄럽고 밝던 아이들의 얼굴이 온통 흙빛이었다고 했다.
고씨의 서랍에는 세월호 참사 추모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이 한가득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을 곁에서 지켜보던 고씨에게 참사는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감각은 책임감으로 이어졌다. 고씨는 매해 4월16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추모 게시글을 올리고, 늘 보이는 지갑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 10년이 지난 지금 고씨는 새삼 리본이 한동안 곁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랍 속 리본은 이미 나눠주고 없거나 너무 오래 사용해 해졌다. 최근엔 주위에서도 리본 단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그는 다시 달아야겠다고 말했다.
노란 리본은 ‘무사귀환’의 상징이다. 2014년 4월 시민들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구조를 염원하며 너 나 할 것 없이 SNS에 노란 리본을 내걸었다. 주부 이선영씨(53)는 중학생 아들의 반 친구 어머니들이 참사 이후 줄줄이 프로필 사진을 바꾼 것을 기억했다.
무사귀환을 바라던 마음은 추모 열기로 이어졌다. 노란 리본은 세월호 참사 추모의 상징이 됐다. ‘REMEMBER 0416’ ‘잊지 않겠습니다’ 문구가 덧대졌다. 이씨는 수학여행을 떠나는 아이들에게 벌어진 일이 학부모로서 남 일 같지 않았다며 이 비극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합의가 있었다고 했다.
전남 진도 팽목항(진도항)과 안산 세월호 합동분향소에도 발길이 이어졌다. 수학학원 강사인 조민호씨(28)는 참사 1년 후 학교 프로그램으로 팽목항을 찾았다. 조씨는 추모공간에 놓인 또래들의 영정사진이 기억난다고 했다. 그는 ‘즐겁게 수학여행을 떠나던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구나’ 싶어 감정이 이입됐다며 여전히 커다란 배나 항구가 보이면 세월호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참사를 기점으로 삶이 달라진 이들도 있었다. 안산에 거주하는 임윤희씨(36)는 참사 후 생애 처음 집회에 참여했다. 한 단원고 희생자의 장례식장에 걸린 앳된 영정사진은 큰 충격으로 남았다. 우리 사회의 생명·안전을 돌아보게 됐다는 그는 이후 시민단체 상근 활동가가 됐다. 추모 열기는 수년간 계속됐다. 직장인 황모씨(32)는 식당에 가도, 학교에 가도, 길에서도 리본을 나눠주던 시절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 많던 리본은 어디로 갔을까. 세월이 흐르며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이들은 눈에 띄게 줄었다. 권민지씨(24)는 스무 살이 되던 2019년 1월 가방을 바꾸며, 새로 리본을 달지 않았다. 그는 리본을 따로 다는 게 보여주기식처럼 느껴졌다며 내가 기억하면 추모이지 않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황씨는 만원 지하철에서 가방에 달린 리본을 잃어버렸다 했다. 대학생 때부터 5년간 달았던 리본이었다. 그는 막상 다시 달려 하니 어디에서 구할지 모르겠더라며 시간이 지나면서 애도의 감정이 옅어지고, 반복되는 참사에 무기력해진 영향도 있다고 했다. 그는 매년 4월이 되면 너무 잊고 살지 않았나 싶어 ‘아차’ 하는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노란 리본이 정치적 표현으로 해석되는 데 부담을 느껴 거리를 두게 됐다는 이들도 있었다. 전요한씨(29)는 노란 리본은 추모이자 우리 사회의 문제에 목소리를 내겠다는 결의의 뜻이었지만, 이제는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일로 보인다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 소극적이게 됐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정쟁이 첨예할 때 ‘공격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리본을 뗀 이도 있다. 오승은씨(25)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달고 다니던 리본을 어머니가 몰래 떼어버렸던 기억이 있었다. 오씨는 이상한 사람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수긍이 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달지도 않았다고 했다. 정인혜씨(29·가명)는 실제로 지하철에서 한 중년 남성에게 이런 걸 달고 다니니 여자들이 안되는 거다라는 등의 폭언을 들었다고 했다.
리본을 잊지 않은 이들도 있다. 여수에 거주하는 김지순씨(72)는 휴대전화 케이스에 노란 리본 스티커를 덧대며 지난 10년을 보냈다. 단 한 번도 세월호 참사를 잊은 적 없다는 그는 다른 사람들도 잊었다기보다는 너무 슬픈 마음에 생각을 묻어둔 것 같다고 했다. 출근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단 직장인 염모씨(57)는 가방을 여닫을 때마다 생각이 난다며 다른 사람들이 제 등에 달린 리본을 볼 때 한 번쯤 세월호 참사를 생각했으면 해서 달았다고 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사는 이철호씨(58)는 가방에 세월호 배지를, 목에는 나무로 된 리본 목걸이를 걸고 다닌다. 외국인 직장 동료들이 목걸이에 관심을 보이면, 그는 한국의 세월호 참사를 설명한다고 했다. 이씨는 멀리서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유가족분들께 자그마한 힘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김화순 화가(54)는 참사 9주기를 앞둔 지난해 3월, 그림에 노란 인스타 팔로워 리본을 달았다. 단원고 앞에 놓인 커다란 벚나무에 세월호 참사 희생자 어머니들이 직접 뜨개질한 벚꽃을 붙인 그림이었다. 4월16일이면 벚꽃도 피고, 봄비가 많이 와요. 벚꽃을 보기 힘들다던 유가족 어머니들이 마주 볼 용기가 생겼다고 연락해오셔서 함께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참사 직후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김 화가는 유가족과 함께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비극적이게도 ‘잊지 말자’는 말은 2022년 다시 힘을 얻었다. 10·29 이태원 참사를 바라본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세월호 참사를 떠올렸다고 했다. 프리랜서 상담사 신지윤씨(29)는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이후 많은 이가 ‘잊지 않겠다’며 고통스러워했는데, 재난을 겪어도 우리 사회는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절망스러웠다며 구급차 소리를 들으면 이태원 참사가 떠오르고, 그러다 보면 세월호가 떠오른다고 했다.
한양대학교 부교수인 이승수씨(59)는 연구실 문에 붙여두었던 노란 리본 곁에 이태원 참사를 잊지 말자는 의미로 리본을 하나 더 붙였다. 보라색 리본은 이태원 참사 추모의 상징이다. 그는 권력의 무능, 무책임, 비윤리가 두 참사의 공통점이라며 돌아보지 않으면 더 좋은 미래를 만들 수 없다고 했다.
이현주씨(26)는 이태원 참사 이후 어떻게 일상공간에서 사회적 참사를 함께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을까를 고민했다. 고민은 세월호 기억공간과 사람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기억의 공간들>로 올해 결실을 맺었다. 이씨는 촬영을 하러 가면 유가족분들이 차를 태워다주시고, 같이 밥을 먹자고 해주셨다면서 내 친구의 엄마 아빠들이시구나, 그걸 가까이서 뵈며 느꼈다고 했다.
기억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전주에 사는 김시항군(14)은 지난달 17일 아버지와 함께 안산 단원고 4·16 기억교실을 찾았다. 어릴 적 일이라 참사 당시의 기억은 없지만, 김군은 전주 한옥마을 앞 세월호 분향소를 들렀던 경험이 있어 참사를 알고 있다고 했다. 학생들이 쓰던 교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공간을 둘러보던 그는 슬픈 참사였다는 것은 알았지만, 국가가 어떻게 잘못 대처했었는지를 이전까지는 몰랐었다며 왜 이런 참사가 발생했는지, 학교에서 따로 교육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상 속에서 참사를 떠올릴 공간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직장인 정민지씨(29·가명)는 미국 9·11 테러를 보면 그 공간을 아예 비워 추모할 수 있게 하는데, 우리는 왜 계속 지우려고만 하는지 모르겠다. 죽음을 기억하는 데 있어 미성숙하다고 말했다. 조민호씨도 슬프기만 한 공간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